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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동래탐험] 생활 속 발견- 동래읍성

by 도움이 되는 자기 2024.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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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찾는 저렴한 마트가 있어,

잠깐 다녀오는 길에..

 

골목에 잘 눈에 들어오지 않게 설치된 표지판이 눈에 띄였다.

 

뭐지??

 

그런데.. 이곳은 좁은 골목길이게.. 성터라할만한 구조물이 아무것도 없는데...

..

 

 

나무위키엔 뭐라 적혀있는지 궁금해진다.

1. 개요[편집]

조선 시대에 현재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산동과 수안동 일대에 존재했던 읍성이다.

2. 역사[편집]

조선 시대에 동래읍성은 일본과의 외교 창구였기 때문에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1]

임진왜란 때는 1592년 4월 14일 그 유명한 동래성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해당 문서 참조.

일본군은 동래성을 함락하고 나서 동래성 동쪽에 위치한 망월산에 동래왜성을 축조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완전히 황폐화된 동래읍성을 보수할 여력이 없어 약 140년간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6배에 달하는 규모로 다시 축성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경제개발기를 거치며 복산동, 수안동, 명륜동 일대는 도심화가 진행되었고, 동래읍성의 서남부는 완전히 유실되게 되었으며 산등성이를 따라 흔적만 남아 있었다. 이렇게 방치되어 오던 동래 읍성의 흔적들을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에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기 시작했고, 1979년부터 1993년 사이에 여러 차례 복원과 보수를 하여 현재에 이른다.

2005년 5월에 부산 도시철도 4호선 공사를 진행하다 현 수안역 자리에서 조선 전기의 해자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이곳에서 동래성 전투 당시 학살당한 주민들의 유골과 각종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3.3.문단 참조.

3. 구조[편집]

조선 전기에 현재의 동래구 복산동과 수안동 일대에 원형의 읍성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조선 전기에 쌓았던 읍성은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의 크기의 17%가 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였으며, 성벽에 치(雉)가 아주 조밀하게 돌출되어 있었고 작지만 해자도 둘러져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지키다 장렬히 전사했다. 사진 정면에 성벽 일부가 산자락에 걸친 부분이 보이는데, 이 동쪽 체성을 왜군이 뚫고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 유적과 사진 속 성곽 및 임진왜란은 상관이 없다.

임진왜란 때 1군에 종군한 요시노 진고자에몬(吉野甚五左衛門)의 비망록에 따르면 "어제 성보다는 닷 배는 큰 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조선의 모든 성채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 보이는 성채"라는 표현이 있으나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 유적은 1731년 정언섭(鄭彦燮)이 개축한 것을 기초로 한다.

5개의 문과 1개의 암문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3개의 장대를 갖추었다. 또한 모든 문에 옹성이 둘러져 있었다.

 

 

2005년 5월에 부산 도시철도 4호선 공사를 진행하다 현 수안역 자리에서 조선 전기의 해자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이곳에서 동래성 전투 당시 학살당한 주민들의 유골과 각종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 수안역에 가면... 정말로 작은 전시관이 있다.

그냥 매번 지나다니기만 했는데..

나무위키로 접하니.. 신기하다.

 

역사 속에서 나는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었던거다.

 

 

 

 

이렇게 조감도를 보니.

가끔 걸으러 나갔던 곳들이 눈에 보인다.

 

다음엔 좀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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