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壬辰倭亂 432주년이다..
이 땅을 지켜내기 위해서..
분투하신 선조들의 노고와 희생에 감사하며 잠시 묵념을 올린다.
그들의 피와 땀, 눈물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이 땅위에 서 있다.
자유롭게 살고 있다..
감사합니다.
관문을 지키다가 순절한 순국선열과 의병들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여 향토 수호와 자주 국방의 정신을 다지고자..
임진왜란을 대략으로 정리해 봤다.
[출처: 임진왜란 (壬辰倭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략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7년)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 · 케이초[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 · 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주2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文弱)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러할 즈음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즉,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일본에는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소[宗義調]에게 명하여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도록 시켰다.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에 있었다.
(중략)
이 와중에 소가 사망하고 양자 소[宗義智]가 그를 승계하여 새로 대마도주가 되었다. 그 역시 도요토미로부터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入朝)에 대한 독촉( ==>조선 왕보고 일본에 들어와서 왕을 뵈라고 한 거니... 이미 싸우자고 말한 거나 마찬가지였다.)이 심해지자, 1589년 하카와시(博多市)의 세이주사(聖住寺) 주지인 겐소[玄蘇]와 가신 야나가와[柳川調信] 및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사신인 시마이[島井宗室] 등과 일행이 되어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칭하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구례(舊例)에 따라 이조정랑 이덕형(李德馨)을 선위사로 삼아서 부산포에 보내어 접대하게 하였다. 대마도주..소 등은 부산진 객관에 머무르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며 함께 일본으로 가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해서는 조선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통신사 파견 문제를 결정짓지 못한 채 소 일행은 일단 돌아갔다.
(중략)(요약:. 대마도주는.. 전력전심으로.. 조선을 돕고.. 일본을 방비하도록 고하였지만.. 조정에선.. 다투고.. 어영부영하면서.. 제대로 대처를 못했다..)
그런데 곧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어 사행을 선정하지 못하다가 11월 중순이 넘어서야 통신사 일행을 선정하였다. 즉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으로 결정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0년 3월에 겐소 일행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대마도에서 한달간 머무르다가 7월 22일에 경도(京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경략중이어서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에 가서야 접견하여 국서(國書)를 전하게 되었다.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도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 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사카이[堺] 포구(浦口)에 와서 답서 오기를 기다리다가 보름 만에 받았다.
그런데 내용이 오만불손하여 김성일은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서 가져오게 되었다. (==>공문서 위조..)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3월이었으며, 이때 일본 사신 겐소 · 야나가와 등도 따라왔다.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지을 때는 그 가부를 가지고 논박을 벌였으며, 사행이 돌아온 뒤에는 그 보고 내용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서인西人 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인東人(정확히는 남인(퇴계학파))'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거짓 보고를 했다)
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黃進)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부사의 무망(誣罔)을 책했다고 한다. (=> 3명중 2명이 온전히 보았으니.. 분명 김성일의 의도성이 드러난다. 어쩌면 ... 김성일은.. 국사를 위한 정탐에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의견을 내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당파싸움에 눈이 멀어.. . 서인西人의 의견에 반대를 위한 반대, 일단 반박을 하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국회에서 ..무조껀 꼬투리를 물고 늘어지며 반대만을 일삼는 행태와 닮았다.).
이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 사이에는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맞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동서의 정쟁이 격화된지라 사실 여하를 묻지 않고 자당(自黨)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을 것이다. 당쟁에 미쳐버린 그들의 행동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이 마미된 상태와 같다. 오늘날 국회를 보면 알 수 있다. 무조건 반대하고... 유치원생 마냥 사소한 것으로 트집을 잡고 물고 늘어지기 바쁘다. 국민의 안위나 대국적인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오늘날 국회를 연상하면 충분히 어떤 식이었는지 생생히 그려진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 결국 전쟁과 그 많은 피와 희생은 김성일이 초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 선위사 오억령(吳億齡)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발병(發兵)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가 도리어 파직을 당하였다.
또 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入貢)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동병(動兵)을 꾀하고 있으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공로(貢路)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이라 했으나 이것도 거절하였다. (==> 일본 사신이 대놓고.. 김성일에게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말을 한 셈인데도..기존의 의견을 번복하지 않고.. 침묵했으니...)
겐소 등이 답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는 다시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請和通好)하는 것이 좋다”라고 거듭 변장(邊將)에게 말했으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그대로 돌아갔다.
그 뒤 왜관(倭館)에 머무르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김수(金睟)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신립(申砬)을 경기 · 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 · 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만이 전비(戰備)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 · 무예 · 축성술 · 해운술을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하고 있었다.
==> 정리하자면...
1. 동서분당東西分黨 이라는 당파 싸움 세력 중.. 東人이 매국-망국(김성일)의 근본이다.
2. 동인은 1589년 해체되어 분리되었는데....특히 남인(퇴계학파) 김성일이.. 매국노였다.
3. 동인東人 -남인南人인 김성일은 공문서를 위조하고, 거짓 정보를 피력해서.. 왜침을 방비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
4. 조정.. 중앙정부내에서도.. 당파싸움으로 자기 편 들어주기로 일관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방조한 셈이다.
요컨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에서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다섯 명의 매국노.. 을사오적(乙巳五賊) 이전에...
동인東人-> 퇴계학파 남인南人인 김성일과 그의 패거리들이란 매국노들이 있었다..
마치 남베트남이 패망한 원인이 남베트남 내부에 있었듯이.. 항상 가장 큰 악은.. 내부의 매국노인 듯 하다.
문제는.. 김성일에 대한 오늘날 역사적 평가다. 전혀 객관적이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다.
"일본 통신사행에 참여한 후 왜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보고를 하여 물의를 빚기도 하였지만 경상도 일원에서 의병을 독려하고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이황 사후 이황문파의 학문적 정치적 성장에 큰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출처: 김성일-우리역사넷]
==> 아직도..제대로 일제 청산이 제대로 안되는 것처럼..
그토록 크나큰 대죄를 저지른 인간에 대한 처벌이.. 전후에.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이 땅의 국풍인가?
그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전 국토가 유린되고 황폐해 졌는가?
할복자살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그 보잘것 없는 목숨을 연명했다는 것으로..
그가 얼마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전혀 부끄럼을 모르는 작자인지 알 수 있다.
살아남은.. 그가.. 추악하게 자기 당파(나라를 망하게 만든)를 키운 것도.. 참으로 이 나라의 비극이라 생각된다.
참 아이러니다.. 이순신같은.. 용기있고 훌륭한 사람들은.. 끝까지 맞서싸우다 장렬히 산화하고...
아마도...탐관오리 같은 비겁자들과 매국노들은 살아남고.. 그것도 잘 살아있다는 것이..
충렬사 사당에 모셔진 분들이.. 저승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을 듯 하다.
다음의 표는 임진왜란 중의 대소전투를 정리한 것이다..
엄청난 전투와.. 승패가 기록되어 있어.. 참혹한 전쟁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출처: 임진왜란 (壬辰倭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92. 4.14. 부산 | 鄭撥 | 少西行長 | 부산 함락, 정발 전사 |
1592. 4.15. 동래 | 宋象賢 | 少西行長 | 동래 함락, 송상현 전사 |
밀양 | 朴晉 | 少西行長 | 밀양성 함락 |
김해 | 徐禮元 | 黑田長政 | 김해성 함락 |
경주 | 朴毅長 | 加藤淸正 | 경주성 함락 |
상주 | 李鎰 | 少西行長 | 이일 패주(전사 아님) |
문경 | 申吉元 | 少西行長 | 신길원 패주 |
1592. 4.26. 탄금대 | 申砬 | 少西行長 | 신립 전사 |
거창 신창 추풍령 | 趙儆 | 黑田長政 | 왜군 다수 사살 |
1592. 5. 2. 한강 | 金命元 | 加藤淸正 | 한강방어 실패 |
1592. 5. 7. 옥포 | 李舜臣 | 藤堂高虎 | 왜선 30척 격파 |
1592. 5. 7. 합포 | 李舜臣 | 脇坂安治 | 왜선 5척 격파 왜군 패주 |
1592. 5. 8. 적진포 | 李舜臣 | 脇坂安治 | 왜선 11척 격파 |
1592. 5.18. 양주 | 申恪 | ? | 조선국 육전 첫승리 |
1592. 5.18. 임진강 | 金命元 | 加藤淸正 | 임진강방어 실패 |
여강 | 元豪 | 毛利吉成 | 왜군 50명 사살 |
1592. 5.29. 사천 | 李舜臣 | 脇坂安治 | 왜선 12척 격파 |
1592. 6. 2. 당포 | 李舜臣 | ? | 왜선 20척 격파 |
1592. 6. 5. 당항포 | 李舜臣 | ? | 왜선 26척 격파 |
용인 | 李洸 | 脇坂安治 | 삼도의 근왕병이 패전 |
회양 | 金鍊光 | 毛利吉成 | 조선군 패전 |
무계 | 金沔 | 村上景親 | 왜군 다수 살상 |
1592. 6. 7. 율포 | 李舜臣 | 來島通久 | 왜선 1척 격파 |
철령 | 李渾 | 毛利吉成 | 조선군 퇴각 |
예천부근 | 禹伏龍 | 吉川廣家 | 왜군 격퇴 |
평양 | 尹斗壽 | 少西行長 | 평양 함락 |
금화 | 元豪 | 島津忠豊 | 원호 전사 |
운암 | 梁大樸 | ? | 왜군 격파 |
마진 | 孫仁甲 | 毛利輝元 | 왜군격파, 손인갑 전사 |
웅치 | 李福男 | 小早川隆景部長 | 조선군 패전 |
이치 | 權慄 | 小早川隆景部長 | 왜군 격퇴 |
1592. 7. 8. 한산도 | 李舜臣 | 脇坂安治 | 왜선 73척 격파 |
금산 | 高敬命 | 小早川隆景部長 | 고경명 전사 |
1592. 7.10. 안골포 | 李舜臣 | 九鬼嘉隆 | 왜선 40척 격파 |
우척현 | 金沔 | 小早川隆景部長 | 왜군 격파 |
1592. 7.17. 평양 | (祖承訓) | 少西行長 | 명나라 1차 조승훈 패주 |
해정창 | 翰克誠 | 加藤淸正 | 조선군 패전 |
영천 | 權應銖 | 福島正則 | 영천 수복 |
의령 | 郭再祐 | 小早川隆景部長 | 정암진에서 왜군 격파 |
현풍 | 郭再祐 | 羽柴秀勝휘하부대 | 왜군 격파 |
영산 | 郭再祐 | 羽柴秀勝휘하부대 | 왜군 격파 |
안성 | 洪季男 | 福島正則 | 왜군 격파 |
평양 | 金命元 | 少西行長 | 조선군 패전 |
청주 | 趙善 靈圭 | 蜂須賀家政의 일부병력 | 청주 수복 |
경주노곡 | 金虎 | 石田康勝의 部兵 | 왜군 격파 |
거창부근 | 金沔 | 小早川隆景의 部將 | 왜군 격추 |
금산 | 趙憲 靈圭 | 小早川隆景部長 | 조헌 전사 |
경주 | 朴晉 | 多川內記 | 조선군 패전 |
성주 | 金沔 | 桂元綱 | 조선군 퇴각 |
봉화 | 柳宗介 | 毛利吉成 | 조선군 패전 |
영원산 | 金悌甲 | 毛利吉成 | 조선군 패전 |
연안성 | 李延 目 |
黑田長政 | 연안성 대첩 |
1592. 9. 1. 부산 | 李舜臣 | ? | 왜병의 해상활동제지 |
성주 | 金沔 | 桂元綱 | 왜군 격파 |
경성 | 鄭文孚 | 加藤右馬允 | 왜군 격추 |
인동부근 | 張士珍 | 禾下重賢 | 왜군 격퇴 |
노현 창원 | 柳崇仁 | 木村重玆 | 조선군 패퇴 |
진주 | 金時敏 | 加藤光泰 | 진주대첩 |
삭녕 | 沈岱 | 伊東祐兵 | 조선군 패전 |
길주 장평 | 鄭文孚 | 加藤右馬允 | 왜군 격파 |
함흥 부근 | 成允文 | 鍋島直茂 | 왜군 격파 |
이원 | 李聖任 | ? | 조선군 패전 |
상주용화동 | 鄭起龍 | ? | 왜군 격파 |
중화 | 林仲樑 | 少西行長의 部將 | 조선군 패전 |
길주쌍포 | 鄭文孚 | 加藤右馬允 | 왜군 격파 |
성주 | 金沔 | ? | 왜군 격파 |
수원독산성 | 權慄 | 宇喜多家部長 | 조선군 승리 |
함창 | 鄭起龍 | ? | 왜군 격파 |
1593. 1. 8. 평양 | (李如松) 金命元 | 少西行長 | 2차 조명-평양 탈환 |
길주성 남문외 | 元忠恕 | 加藤淸正의 부장 | 왜군에게 피해를 줌. |
단천 | 具滉 | 加藤與左 | 왜군 격파 |
벽제관 부근 | (李如松) | 宇喜多秀家 | 조명군 패전 |
백탑교 | 鄭文孚 | 加藤右馬允 | 왜군 격파 |
죽산 | 邊以中 | 福島正則 | 왜군에게 피해를 줌. |
행주 | 權慄 | 宇喜多秀家 | 행주대첩 |
상주 | 黃進 | 福島正則 | 왜군 격파 |
노원평 우관동 | 李時彦 | 宇喜多秀家 휘하군 | 왜군 격파 |
경주 | (王必迪) 高彦伯 | 加藤淸正 毛利吉成 | 왜군 격파 |
함안 웅천 | 安民寧 宣居怡 | 鍋島直茂 | 왜군 격파 |
진주 | 徐禮元 | 少西行長 | 쌍방 피해 |
안강 | 高彦伯 | 加藤淸正 | 왜군 격파 |
1594. 3. 4. 당항포 | 李舜臣 | 脇坂安治 | 왜군 격파 |
1594. 9.29. 장문포 | 李舜臣 | 福島正則 | 왜군 격파 |
1594.10. 1. 영등포 | 李舜臣 | 島津義弘 | 왜군 격파 |
1594.10. 4. 장문포 | 李舜臣 | 福島正則 | 쌍방간에 전과 없음. |
칠천량 | 元均 | 島津忠豊 | 조선군 패전 |
고령 | 鄭起龍 | 小早川秀秋 | 왜군 격파 |
남원 | (楊元) | 宇喜多秀家 | 남원 함락 |
황석산성 | 郭說 | 加藤淸正 | 황석산성 함락 |
소사 | (解生) | 黑田長政 毛利秀元 | 왜군 격파 |
금구 | 元愼 | 宇喜多秀家 | 왜군 격파 |
1597. 9.16. 명량 | 李舜臣 | 藤堂高虎 | 왜선 30척 격파 |
보은 | 鄭起龍 | 加藤淸正 | 왜군 격파 |
광양 | 李光岳 | 少西行長 | 왜군 격파 |
도산성 | (麻貴) | 加藤淸正 | 마귀 패주 |
무주 | 李光岳 (李寧) | 島津義弘 | 왜군 격파 |
(표에서 아주 붉은 색으로 칠해진 3 번의 전투 기록은.. 명나라군의 전투다)
평양성을 탈환한 명나라 장수..이여송도 그 길로 바로 남진하여 개성에 육박해왔다. 그러자 여기를 지키고 있던 고바야가와는 함께 머무르던 구로다와 같이 서울로 퇴각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대결하지도 않고 계속 퇴각하자 이여송은 적을 경시하고 바로 그 뒤를 따라 서울로 향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일본 진영에서는 고바야가와 등으로 하여금 서울 북쪽 40리 지점인 벽제관(碧蹄館) 남쪽 여석령(礪石嶺: 속칭 숫돌고개)에다 정예병을 매복하게 하고 명나라 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급습하였다. 이곳에서 대패한 이여송은 기세가 꺾여 더이상 진격을 못하고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조선측에서 재차 공격을 주장했으나 이여송은 듣지 않았다.
==> 명나라군은 반격의 물꼬를 틀어준 것으로 일단은 큰 도움은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보면..좀..애매하게....절반의 도움만이 된 셈이다.
당시 일본군은 평양성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졌으나 여석령 전투(일명 벽제관싸움)에서 승리하여 회복세에 있었다. 이때 마침 전라감사 권율(權慄)이 명군과 함께 도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하던 중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이르러 배수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2월 12일 도성에 머무르던 일본 대군이 일시에 공격을 해왔다.
권율과 의승장 처영 등은 휘하군을 지휘하여 격전 끝에 그들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삼대첩(三大捷)의 하나이다.
==> 결국 우리의 힘으로 마무리 지은 셈이다.
==> 대략의 전투 상황을 보면..
매국노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위대한 성웅, 이순신 장군이 있었고..
그 이외에도.. 수많은 장수들과.. 병사들과.. 의병들이... 초개같이 목숨을 내던져.. 왜군을 격파해 내셨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가장 위대한 업적을 쌓았지만..
그만의 힘으로.. 조선이 승리한 것은 분명 아닌 것이다.
또한..마치 6 · 25전쟁이 미군과 연합국의 참전과 인천상륙 작전처럼.
1차 5000명, 2차 4만3000명의 군사를 동원한 명나라의 지원이 역전의 가장 핵심이긴 했다. (그로 인해서 명나라도 망했고..)
결과
전후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 · 명 · 일본 등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전야(田野)가 황폐화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서얼허통(庶孽許通), 향리(鄕吏)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 · 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한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한편, 병제(兵制)의 재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戚繼光)주10의 『기효신서(紀効新書)』를 얻어서 절강 무예(浙江武藝)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였다.
1593년 8월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이후 삼수병(三手兵)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속오군(束伍軍)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여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서는 종래의 주무기인 궁시창검(弓矢槍劍) · 총통(銃筒) · 완구(碗口) · 화전(火箭) 외에 난중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가 발명되었다. 또 항왜(降倭)로부터 조총 제조와 염초 자취술을 익혀 실전에 활용했으며, 불랑기(佛狼機)를 모조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난을 통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고 자아 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의 원군 파견으로 숭명 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중에 명군에 의하여 관우(關羽)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난 뒤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關羽廟)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무리한 전쟁을 오래 끌었던 관계로 국민 생활이 피폐해졌고, 침략군 중에는 기아를 못이겨 조선에 투항한 자가 많았다. 또한 일본 국내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도쿠가와[德川家康]가 국내 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또, 조선에서 많은 백성을 포로로 끌고가서 강제로 경작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인 포로 가운데, 도공(陶工)들의 도자기 제조로 일본 도자기업에 큰 발전을 보았으며,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활자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고,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전적(典籍)을 가져가서 일본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킨 탓에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의 여진인에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청 교체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출처: 임진왜란 (壬辰倭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곧..6·25전쟁은.. 74주년 이다..
여 · 야는 싸움박질에 여념이 없어서..조선 시절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듯 하다.
담관오리들은.. 각 지역마다 있어서. .
이권을 챙기고.. 해외여행을 다니거나.. 아방궁같은.. 거대한 건물을 짓기 여념이 없다.
역사는 챗바퀴를 돌고 있는 듯 하다.
걱정스럽다.
**貪官汚吏(탐관오리) :탐욕(貪慾)이 많고 오물(汚物) 같은 관리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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